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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urtesy of the artist & Leeahn Dae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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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Burges Sep 25 – Oct 18, 2008 | Daegu

회화, 공간 그리고 마음


과거에 색깔은 회화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이십 세기 들어 색깔은 또한 회화의 주제가 되는 정도로까지 업그레이드되었다. 회화에서 주제로서 색깔을 다루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Michael Burges는 이러한 예술적 맥락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을 개발했다. 최종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써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색깔을 진지하게 수용하면서 그는 구상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을 두고 "추상적이라거나" 혹은 "자치적이라거나" 혹은 심지어 "절대적이다"라는 표현까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의가 모두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Michael Burges의 회화는 이 모든 측면들에 대한 투자를 과감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구상 미술은 많은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 그것을 두고 "서정적이라거나" "표현주의라거나", "비공식적이라거나" 혹은 "제스추어적이다"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Michael Burges의 미술은 이러한 전통적인 범주 틀에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지어 단일한 한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성격들 중 한 가지 이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거의 과학적인 계획과 발전을 따르며, 보는 이와 반대의 경우에 대한 회화적 가능성들을 탐색하는 것은 물론 색깔과 공간 그리고 그 둘의 관계의 미학적 가능성들을 체계적으로 탐색한다. 따라서 Michael Burges의 예술은 "회화의 과학"이라는 명칭을 얻었고 또 실제로도 현대 물리학 분야에서의 과학적 탐구들과 본질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불교를 지배하는 원칙과의 연관성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화가는 과학자가 되는 것도 불교신자로 불리는 것도 거부할 것이다. Michael Burge는 한 사람의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담화의 층위이지 양자 역학이나 어떤 종류의 종교 혹은 철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 중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면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삽화가 아닌 언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색깔, 공간 그리고 에너지(기)는 그의 창작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Michael Burges 는 색깔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색깔을 다루는 방식은 색깔의 시각적 에너지(기)를 강조하여 색깔이 일상의 문맥에서보다 더욱 명확해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화가와 화가의 추상적 창조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느낌에 긴장하면서Michael Burges는 항상 내면적 자아 혹은 외부 세계 혹은 그 양자로부터 받는 고통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자기 표현이라는 개인적인 제스추어를 애써 피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림이 무엇인가, 그림의 효과가 무엇인가, 그림은 우리의 인식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그리고 그림이 우리의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활성화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잘 정제되고 잘 조율된 탐구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색깔의 자질에 관한 화가의 연구에 덧붙여진다. 또한 Michael Burges의 미술에는 구성의 법칙에서 보이는 강력한 음악적 요소도 존재한다. 그래서 "잘 조율된"과 같은 용어는 비단 메타포(비유)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초기 연작들은 CESM-회화이다. CESM는 Colour-Energy-Space-Matrix. (색조-에너지-공간-매트릭스)의 약어이다. 이들은 추상적인 요소들을 보여주고, 그들 중 많은 것은 "원형 종류"이다. 이 작품들은 깊지만 다양한 초점의 성격을 가진, 변화하는 회화적 공간을 창조하면서 그림의 평면에서 상호작용한다. 보는 이들은 매 번 새롭게 볼 때마다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해야 한다. 실제 공간에 있는 (물리적) 대상의 이미지의 위치를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간 내부는 아니다. 공간과 색깔은 거의 거품 덩어리들처럼 서로 한데 얽힌다. 우리 눈에는 큰 동그라미 모양들이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고요한 섬처럼 움직인다. 보는 이를 파도 쪽으로 밀어내면서 말이다. 

굴절/파도 연작은 어느 면에서는 서로 얽히는 파도를 닮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물론 빛에도 관계하면서 시공간의 연속에서 보이지 않는 움직임, 직관적인 어떤 것에 대한 모형화된 패턴으로 기능한다. 그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질서 체계, 모양 지워진 표면에 색으로 물든 빛의 곧은 굴절의 질서의 상관관계이다. 그리고 동일한 그림의 틀 내에서 물결로서의 빛의 자질들이 탐구된다. 이것은 우리가 색깔로서 보는 것이 어떤 물체의 자질이 아니라 어떤 파장의 빛만을 반사하는 물체 표면구조에 의해 야기된 시각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깔은 다른 빛 아래에서 변할 수 있다. 물체의 자질인 형태는 그렇지가 않다. 1)

Michael Burges는 그것 없이는 우리가 이미지를 인식할 수 없는 어떤 내면적 종류의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등가 이론은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에 공통적인 것이다. 우리는 Michael Burges의 회화를 우리의 지각 체계의 반응 수단에 대한 언급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은 생리학자들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영감들로 보는 이를 이끌 수 있는 그림 속의 그러한 자질들을 화가는 꺼내 줄 필요가 있다. 

가상/빛 연작에서 우리 시각의 이 "게슈탈트"-원칙, 즉 시각적 인상(임팩트)와 이전 경험의 데이터베이스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매치해 보려는 우리 마음의 노력은 역설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특히 명백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가상의 중심 혹은 원천(이것은 물론 착오로 보여진다)과 색깔이 상호작용하는 수직적이고 날카로운 끝을 가진 줄무늬들과 만난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보았던 것이나 물체들과 이미지의 어떤 부분을 실제로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것은 그리고 이것은 놀라운 것이지만, 우리가 하는 것은 이미지를 전체적으로 "물체"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림의 이 부분들(줄-구조 같은)이 그러한 시각적/광학적 존재, 거대한 시각적 경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빛 회화는 우리에게 주인이 어느 쪽인지에 대한 험프티 덤프티 문제를 결정할 기회가 없이 동시에 부분과 전체를 직면하게 한다.

"웨이브wave"주제를 가진 그림들에서 우리 관람객들은 이미지의 지각과 회화적 패턴에 대한 지각을 지배하는 다른 질서와 파워 간의 관계를 목격하게 된다. 일부의 그림에서 이러한 "웨이브waves"는 색깔 굴절의 물리적 요소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현실의 틀 내에서 물체로서 그림을 구성하는 나무 보드 상에서 우리가 물리적으로 발견하는 컬러는 그 컬러들에서 나오는 굴절된 빛과 상호작용하며 보는 이의 위치와 함께 변하기도 한다.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에 집중해야 할 지를 결정해야 한다: 색조로 이루어진 그림의 물리적인 구조, 감추어진 굴절 이미지 혹은 그 양자의 조합(이는 마법과 시각적 매력을 분명히 하며 인상을 강화시킨다).

일부 작품에서 Michael Burges은 한 종류의 질서, 예를 들자면 색깔의 부드러운 끝 줄무늬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웨이브 속에서 동일한 것들의 배치에 대항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 부분 그림의 두 개의 자치적인 부분으로서 그 두 개를 다만 병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전체적인 하나의 패턴을 만들면서 그것들을 결합한다. 그리하여 시각적 패턴의 효과가 훨씬 더 강력하도록 만든다. 직선과 곡선의 줄무늬와 물결 무늬는 서로가 서로를 생성시키는 것 같다.

그 웨이브들이 진정되어 직선으로 되었는지 혹은 그 줄무늬들이 물결을 형성할 정도로 동요되었는지 정확히 결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끝없는 결정 또 결정과 재결정을 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20 세기 한 중간에서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로 불리던 것의 완벽한 모델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을 보는 우리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보는 우리의 방식은 다른 그리고 때로는 대조적인 집중화의 과정이 중단 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 속 어딘가에 저장되지만 오직 선택된 것들만이-그 선택의 과정은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않고 있다–– 다시 기억을 통해 되뇌어진다. 필요 없는 정보에 익사하지 않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아래 참조).

많은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시각적 사고가 언어적 사고보다 더 초기에 발전하는 사고의 기초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의 관심은 커뮤니케이션의 비 언어적, 미학적 기능에 이끌린다. 그리고 Michael Burges 의 그림은 정확히 그 방향에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의 작품들은 이미지의 사고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한 지식 습득과 지식 축적의 과정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Michael Burges의 그림들은 조직과 정보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탐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다의성이 인정되며 동시에 다른 시각을 인정하며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 중 많은 것들이 다 초점이고 위치에 따라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변한다. 왜냐하면 한 가지 집중 방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고개를 드는 것은 현대 양자 물리학이다. 표면에서 조직은 분명하다. 그것은 컬러와 빛으로 대변되는 표면의 진동(에너지) 속에 존재한다. 이것과 끈 이론을 연결하는 창은 물론 열려 있다. 그러나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끈 혹은 M-이론은 매우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층위를 제외하면 유사(유추)에 대한 이상적인 파트너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진동 개념이 Michael Burges의 회화라는 한 우주에서 시각적인 진동으로 반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가상의 장면들이라는 명칭의 그의 회화 연작들에서처럼 구상적인 연상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 연작들에서 우리는 그저 눈으로 보여지는 것과 안개 짙은 풍경을 손쉽게 연결시키거나 혹은 방 안의 반쯤 열린 블라인드, 증기가 자욱한 창문과 밤의 네온 빛 도시 풍경, 경관을 연결시키는 연상 작용을 경험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꺼번에 거의 모든 것을 결합시킨다: 굴절, 반짝임, 반사된 빛, 컬러로서의 컬러와 빛으로서의 컬러, 물질로서의 컬러와 기(에너지)로서의 컬러, 가상적 (시각적) 회화적 공간, 보는 이의 작은 도움으로 끝없이 재 발견, 재 규정되는 것. 이러한 시각적 인상은 가히 압도적이고 그래서 우리 보는 이들은 그것들이 전하는 변화무쌍한 표현들에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재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보이는 만큼 많은 다양한 지각 이미지들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실체화되는 가능성들을 구성한다. .

Michael Burge의 작품 특징은 강력적 대조적 컬러의 사용으로 대변된다 (그러한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로 강력하고 빛나는 컬러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주 그 컬러들을 회색과 결합하는 방식을 택한다. 회색은 모든 색 중에서 무채색이며 동시에 컬러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색이다 (또한 모든 색깔의 무덤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성의 우주, 그러나 다시 시각적으로 자기 표현적이기도 한 우주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Michael Burges은 아주 개혁적인 연작, 가상 공간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 작품에서 색칠된 판은 아크릴 유리판으로 조직된 앞 판, 유백색의 아크릴 유리 박스 속에 넣어져 있다. 그래서 색칠된 것은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박스 속에서 떠도는 특별한 종류의 컬러풀한 색조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간 어딘가에서 떠도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비 물질화와 동일하고 따라서 이미지의 탈 초점화이다. 눈은 어떤 것도 더 이상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미지로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움직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구조화된 판의 특성이기 때문에 보는 이는 제 위치를 바꾸면서도 이미지를 정확하게 위치시킬 수 없다. 반대로 보는 이는 이미지의 가능성들을 탐색하기 위하여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이미지의 실제 위치는 보는 이의 마음 속에 있다 – 보는 이가 인지하는 것은 변화하는 이미지들의 총 합계이다. 그리하여 복잡한 산물은 보는 이의 복잡한 심리적인 구성물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둘은 미학적인 경험과 반사라는 층위에서 일치한다. 

물리학자는 불확정성 원칙 때문에 미립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결정할 수 없다. 여기서 관람객은 이미지의 위치를 결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미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이미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은 보는 이가 그 자신에게 던져져 자신의 마음 속에 저장된 각종 데이터에서 은신처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상의 박물관관 도서관들이 어떻게 해서든 활성화되어야 하고 이미지들은 그러한 목적을 향해 가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그의 최신 회화 연작, 역 유리 그림들 에서 Michael Burges는 이전에 다루었던 주제들을 취한다. 그는 CESM (Colour-Energy-Space-Matrix, 색조-에너지-공간-매트릭스) & 굴절 회화와 같은 주제들을 가상 공간을 창출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과 결합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완전히 새롭게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유사점을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큰 차이들을 더욱 확연하게 경험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작업들에서 모든 컬러와 패턴 그리고 회화적 형태들은 아크릴 유리의 투명한 판 뒤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판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판 위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 유리 그림이고, 민속학적 문맥에서 익사하는 것으로부터 예술이 구출되는 것이다. 컬러는 순수와 맑음을 나타내며 거의 초자연적인 존재를 얻는다. 유리 화판은 또한 그 외양을 결합하는 기능을 한다. CESM-타입이든, 굴절 타입이든 혹은 실제로 자율적인 구성의 새로운 종류이든 간에 어떤 그림이든 다른 모든 것과 밝고 반짝이는 존재를 공유한다. 이미지들이 구획화된 틀 위에 올라 있고 화판이 이 모든 틀의 면들을 넘어 뻗어 있다는 것은 초기 작품들의 경우처럼 가상 공간뿐 아니라 두드러지고 특별한 사물의 자질을 제시해 준다.다시 이 모든 것은 보는 이와의 상호작용에 기여한다. CESM-회화와 유사하게 보이는 역 유리 그림은 실제로 하나의 다 초점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 이미지 앞에서 보는 이는 자신의 위치를 옮겨 규정과 재 규정을 반복해야 한다. 삶 전반에 대한 예술적 유사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우리의 풍요로운 내면적 도서관, 우리의 가상적 박물관 그리고 각종 저장 데이터로 가는 문을 만나게 된다. 자폐성 인간들과 학자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제시된 바는 우리는 보고 듣는 거의 모든 것을 뇌 속에서 기록한다는 것이다. 필요 없는 모든 정보를 걸러내는 선택이라는 중화 메커니즘이 없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쓸모 없는 정보에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에 제대로 불을 피워 보지 못하고 다만 재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석학들은 적어도 이러한 기억들의 부분에 접근한다. 그리고 다-초점 회화는 또한 우리 내면에 깊이 묻어 둔 것으로 가는 문(좁은 문이기는 해도)을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역 유리 그림 과 초기 작품들 간의 큰 차이는 아크릴 유리 화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미학적 개척의 첨병이기 때문이다. 초기 작품의 거칠고 굴절된 표면은 거기에 더 이상 없다. 대신에 보는 이는 닫혀지고 매끄러운 표면과 마주하게 된다. 이 표면은 컬러가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컬러는 뒤로 물러나 있다. 또한 보는 이는 저지당한다. 그것(아크릴 유리 화판)은 들어가는 문일 뿐만 아니라 가로막는 장벽이기도 한다. 

그것은 정서와 풍경의 세계의 차원으로 열린 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안에서 모든 요소들은 처음에 컬러의 결합에 의한 정확한 정의를 좌절시키며, 분해 혹은 규정 불가능한 공간적 위치 속에서 모든 요소들이 형성된다. 그러한 일견 대조적인 요소들이 화해하여 새로운 해석을 낳고 혹은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위치를 만들어 주는 것은 보다 차원 높은 층위-회화의 층위-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카프카 이야기의 상황과 유사하다: 아크릴 유리는 신성한 나라의 풍경을 열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제지한다. 우리는 창문에 날아드는 파리처럼 느껴진다. 파리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창문을 통해 안으로 날아들고자 하는 시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 지속되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끊임 없이 그 장벽을 넘어서 보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파리들보다 더 나쁜 상황이다. 왜냐하면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이 그림들이 그토록 매력적인 경험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다.

더욱이 역 유리 그림 은 새로운 회화적 형태와 요소의 전체적인 음역과 범위를 전달해 준다. 앞에 있는 것과 그리고 뒤에 있는 요소들의 위치 간의 끝없는 변동 그리고 어딘가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사이의 끝없는 변화는 전체 그림 화판의 강력한 역동성을 전달한다. Riemann-tensor에 의한 정의를 원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미 미학적인 Riemann-tensor, Burges-tensor의 형식이며 회화 분야에서 구성요소들(점, 선, 면 등의)의 상대적인 가치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를 완벽하게 묘사하는 가장 적은 가능성의 모델이 이미지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일부 화가의 요소들은 컬러와 붓을 다루는 경험의 일종을 가진 자들에게 적어도 그 자체로 유리 위의 역 그림과는 다른 매체에서는 실제로 불가능함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림의 과정이 거꾸로라는 사실 때문이다. Burges는 초기 작품들에서 일반적으로 끝낸 지점에서 이 그림들을 시작한다. 여전히 화가 행동의 앞 전면(화가에겐 밑바탕)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관통하는 캔버스 위의 색칠된 이미지와 같다. 모든 것이 역으로 갈 뿐이다. 밑바탕은 앞 (혹은 위)이고 위는 밑바탕이다. 안은 밖이고 그리고 여전히 모든 요소는 그 수중에 확고하게 둘 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보여진 많은 요소들은 선택된 매체에 고유한 것이고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실제 공간과 관련해서든-이러한 이미지들 역시 물체로 명확히 규정된다는 것을 명심할 것-회화적 공간과 관련해서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주어진 요소에 대하여 공간적 위치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보는 이들의 마음의 기반을 흔든다.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한 미학적 탐색은 떠도는 이미지들의 발견이고 블랙 홀의 지평을 어쩔 수 없이 넘어버린 우주 비행사처럼 이미지들이 사라짐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또한 미학적인 용어로 일종의 화이트 홀이기도 한다. 그 이미지들의 시각적 현존은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Michael Burges에게 아주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실제 과학적인 정확도와 더불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이 작업들은 "이미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형식으로 "이미지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추구를 계속한다. 그 대답은 이미지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미학은 그것들이 의미론적 성격이든 그렇지 않든 여러 요소들의 구성 형식이다. 일단 그 구성이 어떤 특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미학적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지의 문제, 지각의 문제라는 것은 자연에서 우리가 미학적 "구조물들"을 발견한다는 사실, 심지어 정상적으로 보여질 수 없는 곳에서도 우리가 미학적 "구조물들"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존재"는 목적론적이 아니다. 어떤 목적에도 기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인지 구조가 그것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들은 Schrödinger의 미학적 고양이이다.

새로운 회화 중 어떤 것은 수평의 푸른 막대기의 수직적 연속 혹은 하얀 종류의 기둥처럼 중심 모티브를 다룬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그 고유의 회화적 문맥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각각은 다르며 독특하다. 그것은 동등한 혹은 똑 같은 요소들의 연속이 아니다. 사실상 연속이나 중심적인 형체는 불가피하게 이미지 내부의 이미지 같은 무언가를 구성할 것이다. Michael Burges의 회화에서 우리는 주로 독립적인 회화적 요소들과 만나게 된다. 이것은 그 독립적인 회화적 요소들이 그것들의 현재적 맥락에서 끄집어내졌을 때에 미학적으로 여전히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역 유리 그림 과 연결된 새로운 색조주의 또한 존재한다. 초기 작품들에서Michael Burges는 컬러의 죽음으로서 그리고 컬러의 가능성으로서 동시에 회색을 사용했다. 그의역 유리 그림에는 실제적으로 이들 중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여유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 유리 그림에서는 그림의 거친 표면이 보는 이의 위치와 모호한 빛과 "상호작용" 했을 때 이것이 가능했다. 그런 종류의 표면은 없다. 그래서 회색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반영은 일어나지 않는다. 

Michael Burges가 화가 자신과 우리들을 위해 어떤 가능성들을 창조했는지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 이른 단계이다. 그러나 그의 역 유리 그림을 잠깐만 훑어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우리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어떤 약속된 땅,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 빼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땅으로 가는 길을 모험적으로 열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컬러의 범주에서 블랙을 제외할 가능성이 있다. 이 세계에 대한 철저한 논의는 여기에서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 참조: Lisa Randall: 일탈적 통과. 우주의 숨겨진 차원 발견하기, 런던, 뉴욕 등., 펭귄사 2006, p. 119 ff; Michio Kaku: 사차원. 평행의 우주, 시간 일탈 그리고 10 차원을 통한 과학 오디세이, 뉴욕, Anchor books 1995, p. 197; 그리고 동일 저자에 의한 평행한 우주. 창조를 통한 여행(...), 뉴욕, Anchor books, pp. 56-57, 74-75.

 

Gerhard Charles Rump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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