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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urtesy of the artist & Leeahn Cha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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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hyun Koo Nov 28 – Dec 19, 2007 | Changwon

Light Dramas - Attempts by KOO, Ja-hyun 

Not all we see in a painting comes from color. Gold and silver seem like color, like red, blue, and yellow, but are fundamentally different. More than simply color, gold and silver reflect light, instead of absorbing it. There are no shades or hues. Instead, with them, we find light. Used to represent holy space or divine nature in religious painting, gold and silver depicts the light of the sun, moon, and the stars. They represent holy space and sacred being; divine light; day and night. They are applied separately to the sun and moon to distinguish lights between day and night, yin and yang. And they pervade KOO, Ja-hyun's paintings, without religious representation or overt divine quality.

Gold and Silver express light, not colors. That is why unlike other colors within the range of visible ray, they reflect almost all lights instead of absorbing them. In this sense, Koo, Ja-hyun expresses lights. Rendered entirely in gold and silver, they are rich with it, unlike other paintings done in ordinary hues. We thus get the unique experience of a space from which light issues like a light source. In a work of gold and silver circles on a white background, for example, circles do not just depict the sun and moon, they are pictorial elements-in-themselves on a two-dimensional surface, each reflecting light as the background absorbs it. We thus see contrasting elements like water and oil, light and shade, mingling as one. And as a circle is the presentation of satisfaction and perfection, no discord or unrest occurs. Rather, each looks serene and stable. Each work is a drama of light, with circles emitting light like light sources, as backgrounds engulf it.

KOO, Ja-hyun's canvases create extraordinary places where light appears simultaneously conspicuous and subdued. We can see and experience its unprecedented possibilities. In his work, our eyes confront light, without just seeing passively, in a similar experience to seeing painting. But as our seeing mixes with the mingling elements, each canvas becomes a place of absoluteness. 

Painting is an intellectual act that derives from sensibility. One's sensibility is brought into a viewing space we refer to as nature. The space is another name of nature. He captures and objectifies this so naturally, there is no seeing without the light.

LEEAHN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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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드라마 -구자현의 시도 

치바 시게오 

비 오는 양수리 
양수리와 맞닿은 계곡을 조금 올라간 곳에 위치한 구자현의 아틀리에는 조용했다. 작품은 아틀리에 안에 놓여 있지만 건물 바깥의 자연을 배경으로 고요하나 확연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작품들이 강렬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금색과 은색을 사용해서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강렬함은 아틀리에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밖으로 펼쳐진 공간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또 하나의 인상과 연관되어 있었다. 

금과 은은 색이 아니다 
그림에 쓰이면 모두 색채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혹시 금색이나 은색도 청 적 황과 같은 색채라고 착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는 근대 이전의 미술에서 금색과 은색이 쓰인 예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이 색채들은 종교미술에서 신성한 공간을 표현하거나 신불의 형상에 쓰였으며 또한 해, 달, 별 등의 일월성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전자에서는 그것이 성스러운 공간이며 성스러운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었고 후자에서는 '빛'을 대신한 것이다. 그래서 해와 달을 금과 은으로 구분해서 사용한 것은 낮과 밤의 빛, 양과 음의 빛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덧붙여서 말하면, 지금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전기 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제조법으로 만든 촛불만으로 은색(은박)의 달을 보면 그 색이 오히려 금색으로 보인다는 것을. 
 옛 화가들이 자각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성스러운 공간의 배경'도, 신불의 형상인 '금색'도, 일월성진의 '금색'도, 그림으로 그린 것은 아니다. 회화의 다른 부분과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며 성스러운 신체를 '가리기 위해서 장식한' 것이며 빛으로서 '놓여 있는' 것이다. 물감으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은 물감이 아니고 실제 금속을 아주 얇게 만들어서 붙인 것이다. 금색과 은색이 물감으로서 이용되고 사람들의 종교심이 약화되면서, 특히 근대 이후 이것들은 다른 색의 물감과 같아져 버렸다. 그리고 이후 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 금색과 은색을 
 그 금색과 은색을 구자현은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단 미리 알려두고 싶은 것은 거기에는 종교적인 신성성의 표현은 없다. 
작품의 전개를 더듬어가다 보면 알 수 있는데 그의 표현은 조금씩 단순화를 지향해왔다. 그는 원래 구체적인 형태를 거의 그리지 않고, 주로 '선'에 의해 다양한 구성과 표현을 시도해왔다. 그런데 그 시도가 전체적으로 목적한 것은 단순화 혹은 미니멀라이제이션(이는 미니멀 아트라는 의미가 아니다)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동일한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지표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단지 금색(금박)이나 은색(구자현의 경우는 백금박), 혹은 백색만으로 된 작품의 등장이다. 또 하나는 금색의 원, 은색의 원으로 된 작품의 출현이다. 

빛의 흔들림 속에 
 금색이나 은색이 '색채'가 아닌 이유는 다른 가시광선 범위 내의 색과는 달리 대부분이 빛을 흡수하지 않고 반사해 버리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서 빛이 난다. 금이나 은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색채가 아니라 '빛'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자현은 빛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화폭을 바라보고 있으면 빛이 풍부하게 흔들리고 있는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나는 금색, 은색뿐인 회화를 앞에 두고 보통의 색채로 그려진 작품과는 달리 그림 그 자체가 빛이라는 체험을 하게 된다. 회화 속에서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고 회화가 마치 광원처럼 되어 회화와 그곳을 보고 있는 나 사이의 공간에 빛이 일고, 그 빛이 흔들리고 있는 아주 독특한 공간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회화는 중간의 퍼져감 속에 존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회화의 내용이 물리적인 화면 속에서 바깥으로, 내 앞 공간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체험이다. 캔버스와 바라보고 있는 나와의 관계, 그 상태가 크게 바뀌어 본래의 것이 위상변화 같은 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의 흰색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어떠한가? 보는 순간 광택이 없는 밋밋한 느낌이 신기해 물어보니, 석회와 토끼 가죽을 이용한 제소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의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하자면 빛을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백색과 흑색도 평범한 색이 아니다. 보통의 의미에서 색채가 아니다. 다만 그것은 금색과 은색과는 반대로(윤이 나면 날수록) 빛을 흡수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흰색만으로 이뤄진 작품 앞에 서면 내 눈은 거기에 흡수된 빛을 쫓아가듯이 화폭 안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같다. 화면과 나 사이에 이미 공간이 없어지고 내 눈은 바로 화폭 자체가 된다. 이때 '회화'는 내 눈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회화 자체가 되어버린 내 눈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내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흰 화폭뿐이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빛을 삼킨 흰 화폭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화폭 자체의 어디에도 회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내 눈길을 붙잡고 더욱더 화면 속으로까지 삼켜버린다. 이때 회화는 빛의 흔들림 속에 있다. 

둥근 모양 
 누구나 금색 원과 은색 원을 보면 태양과 달을 연상할 것이다. 이것들은 또한 햇빛과 그늘의 상징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빛 그 자체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두 가지가 있다. 둥그런 사각형의 화면에 원형을 표현하면 원형 이외의 부분은 그대로 바탕이 된다는 것. 구자현의 경우 이것은 광택 없는 백색과 흑색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각형의 어느 위치에 어느 정도의 크기로서 원형을 표현할 것인가 하는 구성의 문제가 불가피하다는 것. 그의 작품의 경우, 금박이나 백금박을 붙이는 각도의 요소도 더해진다(박을 조금 비스듬하게 붙이는 것만으로도 움직임이 살아난다). 
이는 금색, 은색, 흰색만의 작품보다 훨씬 회화적이고 구성적이다. 즉, 이는 보다 회화적인 조건이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빛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최성훈이 말한 것처럼 변함없이 "절대성의 달성"(achievement of absoluteness)'을 목표로 삼고있다. 
예를 들면 바탕이 흰색이고 금색 원형을 그려 넣은 작품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둥근 형태만 보지 않으면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태양이나 달이 아니고 평면상의 그림이 갖는 한 요소이다. 하나의 화폭 위에서 원형 부분은 대부분 빛을 반사하고 바탕에 해당하는 부분은 대부분 빛을 흡수한다. 이로 인해 나의 눈은 물과 기름의 관계, 명암의 관계를 하나의 형태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원형은 충족된 형태, 완결된 형태이므로 내 눈에 불편함이나 불안은 발생하지 않는다. 내 눈은 만족하며 조용하다. 그리고 고요한 상태에서 화면 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빛의 드라마를 받아들인다. 둥근 형태는 강력한 광원처럼 빛을 발하고 바탕에 해당하는 부분은 모든 빛을 삼킨다. 그렇게 화폭은 빛을 발하고는 가라앉고, 가라앉았다가 다시 빛을 발하는 특이한 장소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 장소를 눈으로 보는 것, 이 장소를 체험하는 것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회화의 가능성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구자현의 작품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 현상, 이 사건은 눈과 눈빛을 향한다. 눈이 막연히 한 장의 화폭을 보는 상태에서 벗어나 바로 앞에서 빛과 직접 대치하는 상태로까지 이끌려가는 것이다. 이것이 회화 체험, 나아가서는 빛의 체험이고 하나의 절대성으로 장소를 인식하는 것이다. 

비가 개이고 
 구자현의 아틀리에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벌써 비는 개었지만 아직 햇살은 비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까보다 훨씬 환해져 아틀리에의 느낌도 꽤 달라져 있다. 오늘처럼 날씨가 맑지 않은 날에는 작품이 품고 있는 빛, 그 자체의 빛이 늘어나 표면으로 드러난다. 햇살이 비치면 그것은 현실의 빛과 융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처럼 빛을 통해 자연과 이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극히 지적인 행위지만, 그 지(知)는 감성에 기인한다. 화가의 감성을 낳고 기르는 것은 그가 살아 온 공간이다. 그리고 공간이란 우리들이 자연이라고 불러온 펼쳐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태어난 인간이, 펼쳐짐을 눈으로 포착하고 객체화한다. 이것이 '공간'이다. 이런 연유로 빛이 없으면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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