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마리끌레 I 이건용 작가 인터뷰 Sep 06, 2023

 

평생 동안 한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경기도 고양의 작업실에서 이건용 작가를 만나
달팽이걸음처럼 느리게 걸어온
그의 작품 세계를 돌이켜보았다.

그곳에서 목도한 한 예술가의 삶의 뼈대,
굳건한 신념의 조각들.

 

 

the Art of Slowness
달팽이 걸음으로 80년

 

 

7월 14일, 페이스 갤러리 뉴욕에서 이건용의 개인전 <달팽이걸음>이 열렸다. 그의 뉴욕 첫 개인전에서는 회화 연작 ‘보디스케이프(Bodyscape)’와 퍼포먼스, 아카이브 자료를 선보였는데, 전시 첫 날부터 몰려든 미술 애호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프닝에 서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공개한 퍼포먼스 ‘달팽이걸음’을 다시 한번 선보여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뉴욕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스 갤러리 뉴욕 전시가 호평을 받았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달팽이걸음’ 퍼포먼스는 1979년 대전 남계화랑에서 초연하고, 그해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선보였기 때문에 내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백묵으로 선을 그린 후, 그 위를 맨발로 다시 지나가면 선이 자연스럽게 지워지지요. 10미터 길이의 비닐 시트 위에서 내 몸이 지나간 자리에 선을 그리고 지우는 행위는 창조와 소멸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몰려 3백 명만 예약제로 입장했어요. 퍼포먼스를 끝내고 보니 갤러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서 놀랐습니다.

‘달팽이걸음’ 퍼포먼스에 대한 뉴요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퍼포먼스를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했지요. “오늘날은 속도의 시대입니다. 비행기 타고 여기에 온 내가 하는 퍼포먼스는 느린 생명의 속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문화와 문명, 기술을 창출하기 위해 써왔습니다. 하지만 그 써버린 에너지로 인해 많은 괴로움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지구촌 전체가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며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가장 평범한 자연의 속도를 지켜봐주세요”라고요. 사실 나는 이 퍼포먼스가 싱거운 행위이기 때문에 조금 보다가 중간에 다들 나가버릴까 봐 걱정했습니다.(웃음) 그런데 많은 사람이 끝까지 퍼포먼스를 보고 박수를 보내줘 감동받았어요. 뉴요커들은 현실주의자이고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달팽이처럼 선을 긋고 발바닥이 스치며 그 선을 지우는 모습을 보고 그게 뭐냐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들 좋아했어요. 어떤 이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이렇게 인상적인 퍼포먼스는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퍼포먼스라고 하면 발가벗거나 소리를 질러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데(웃음), 조용하고 단순한 나의 행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퍼포먼스가 끝나고 다들 갤러리 2층에서 전시를 꼼꼼히 보고, 7층에서 아카이브 자료를 보는 모습을 보며 기뻤습니다.

작가님은 몸을 이용한 회화와 퍼포먼스가 특징인 아방가르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3년 참석한 파리 비엔날레 참가 이후 신체의 가능성을 발견하셨다고 들었어요. 상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미술의 고정관념과 제도적 구조를 벗어나고 싶어서 신체를 이용하게 되었지요. 파리 비엔날레에 갔다가 여러 공연과 전시를 본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리의 어떤 전위예술가는 극장 안에 망아지 두 마리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모습만 보여주었는데,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망아지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 망아지가 등장한 것이 충격적이었어요. 어떤 남녀 예술가는 몸 그 자체로 등장해 낱알을 뿌리며 삶과 죽음을 보여주었지요. 전시장에서 신체를 발견했습니다. 과거의 매체에서는 다듬은 조각을 좌대에 올려놓았는데, 비연극적 현실 자체에서 신체의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내 몸이 서울로 간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직접 가지 않고 작품만 파리에 보내도 되는데, 내가 작가로서 파리에서 나무와 흙을 이용해 설치 작품 ‘신체항’을 만들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 것이지요. 그간 객체적 매체를 전위적이고 실제적으로 사용했지만, 이를 실현하는 작가의 몸 자체가 예술의 미디어임을 간과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내 몸을 예술의 미디어로 써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동안 대상으로서의 신체성, 예술 매체로서의 신체성, 느끼는 자의 신체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 역시 “세계는 신체의 기지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했습니다. 관념론자는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성립시켰고, 이것이 과거의 예술이었습니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신체를 떠나 관념을 떠드는 것은 허위라고 말했고, 나 역시 이에 동감합니다.

예전에는 새로운 미술 개념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1979년에도 퍼포먼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대전 남계화랑에서도 끝없이 긋는 선의 일부가 지워지는 것을 보고 자기 인생 같다고 말한 이도 있고, 전율을 느꼈다는 이도 만났습니다. 나는 화랑에서 회화의 연결을 보여준 것이고, 관람객은 자신의 인생을 비추어본 것이지요. 어떤 학자가 노자와 장자 이야기를 하길래, “그것은 당신의 것이니, 당신이 가져가시오”라고 답한 기억이납니다.

이번 뉴욕 전시에서는 새로운 ‘보디스케이프’ 연작도 보여주셨지요? 어떤 기준으로 전시 작품을 선정하셨나요?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보디스케이프’ 연작 중 하트 모양으로 완성되는 76-3을 선호하고, 서구에서는 깁스를 한 채 팔을 고정해 그림을 그리는 76-1 연작을 선호합니다.(웃음)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은 감성적이라 76-3을 좋아하고, 76-1 연작이 기존 미술에 반하는 개념을 드러내는 철학적 작품이라 이성적인 서구에서 인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를 위해 76-1이 연상시키는 천사의 날개를 그렸습니다.(웃음) 전시마다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것을 즐깁니다. 기계적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알다시피 ‘보디스케이프’는 내가 1976년에 명명한 9개의 퍼포먼스에서 비롯한 회화 연작입니다. 그래서 76-1에서부터 76-9까지 번호로 작품 제목을 붙였습니다. 미술가라면 자신 앞의 평면에 무언가를 그리지만, 나는 이 연작을 통해 내 신체가 허용하는 만큼만 화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선을 그립니다. 평면을 보고 의식이 지시하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팔이 움직여 선을 그으며,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앞으로 뉴욕에서 1년간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면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겁니다.(웃음)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독창적 작품 세계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학생이었을 것 같습니다. 난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과 어머니에게 “왜 그림을 실제와 똑같이 그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했어요. 똑같이 그리면 재미없고, 대상과 똑같이 그리려면 사진을 찍으면 되지 왜 그림을 그립니까? 나는 오히려 물감이 번지고 흘러내리는 것이 물질적이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현대 철학을 공부했고, 혼자 서울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 독일 문화원, 미국 문화원을 다니며 세계 예술의 흐름을 경험했어요. 영화와 책을 보고 학회에도 참석했지요. 돌이켜보면 나는 중학교 때부터 혼자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홍릉에서 임업시험장 길을 걸어서 경희대학교 정문까지 갔는데, 삼복더위에 아버지가 미국 구제 물품 중에 구해 온 노란 풀오버를 입고 털모자를 쓴 채 그 길을 걸어가다가 10분간 서 있는 행위를 했어요.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받은 구제 물품을 입고 현재를 생각해보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시작해서 여태까지 내가 한 퍼포먼스 시리즈가 90개가 넘습니다. 잊어버리기 전에 90여 개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만들어놓고 싶어서 미술관에 제안한 적이있는데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나무를 이용한 작품도 만드셨어요. 대구미술관 회고전에서 머리카락과 껌, 소변으로 만든 작품도 보았습니다. 지금도 껌 씹고 나면 작업실 벽에 붙여둡니다. 속상한 일이나 생각할 일이 많으면 껌을 씹곤 하거든요. 그래서 껌으로 만든 작품도 많아요. 아침마다 빠지는 머리카락도 여전히 모으고 있습니다. 예술 행위는 간단히 그만둘 수 있는 장난이나 쇼가 아니지요. 오줌도 모았고, 더 모으고 싶은데 우리 집사람 승연례 작가가 말려서 요즘은 그만두었어요. 아마 나 죽으면 비싸게 팔려서 후회할 겁니다.(웃음)

승연례 작가님도 ‘야자나무’ 연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분이 같은 건물에서 작업실을 나누어 쓰시는데,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십니까? 나는 캔버스를 보지 않고 신체 드로잉을 그리는데, 우리 집사람은 야자수를 보면서 그린다는 점이 다릅니다(웃음). 시원하게 휘두르는 필력, 필선에 대한 공감이 있습니다. 승 작가가 군산에서 1남1녀를 키우고, 건강이 좋지 않아 그간 그림을 그리지 못한 시기도 있었지요. 앞으로 건강하게 작업을 계속하기를 바랍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가 끝났고, 9월 1일부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전시가 이어집니다. 2024년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 해머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고요. 당시 함께 활동했던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승택 작가 등 29명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여서 미술 애호가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각각의 독창성이 강한 작가들인데, 실험 미술 작가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엮이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십니까? 그런 부담보다는 오히려 ‘실험 미술’이라는 용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우리는 당대에 앞서 나가서 아방가르드 작업을 한 작가들인데, 실험 미술이라고 지칭하면 뭔가 실험적으로 작업했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나는 매 순간 목숨과 의지를 걸고 작업했고, 실험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겠다는 의도는 아니었거든요. 실험 미술보다는 앞서가는 전위예술, 아방가르드 예술이라고 그룹전 한글 전시 제목을 지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구겐임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제목은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입니다. 8월 말에 페이스 갤러리 뉴욕 전시가 끝났지만, 구겐하임에서 내 작품을 뉴요커들이 계속 볼 수 있어 기쁩니다. 구겐하임에서는 ‘보디스케이프’ 연작과 퍼포먼스 아카이브 사진뿐 아니라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신체항’ 연작을 새로 현지 제작해 선보입니다. 이 작품은 대구미술관이 소장해 로비에 전시하고 있어서 이미 본 분이 많을 겁니다.

미국 동부와 서부의 대표 미술관에서 우리나라 전위미술 전시가 열리면, 한국 현대미술이 다시금 세계의 주목을 받을 것 같아 반갑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 미술 활동의 가치 평가가 저조합니다. 외국에서 공부한 미술 관계자와 이론가는 해외 작가 연구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 현대미술 작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합니다. 미술계 내부의 연구가 부족하다 보니, 대중도 그 가치를 아직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아방가르드 활동의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번처럼 해외 전시를 하다 보면 해외 평론가에게 “당신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세계 무대에 나왔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우리나라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한국에서 전시를 많이 했지만, 중국이나 일본 작가에 비해 국가 시스템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 구겐하임과 해머 미술관 전시 이후 우리나라의 1960~1970년대 미술을 다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이건용 키아프 서울 Kiaf 미술

 

 

미술 그룹 ST(Space and Time)의 창립 멤버이셨고, AG(Avantgarde)에서도 활동하셨습니다. 이번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함께 전시하는 작가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던 그룹인데요. 그분들과의 교류는 어떠셨나요? ST 그룹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아트 뉴스(Art News) 모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네요. 1960~1970년대는 우리나라에 모든 정보가 미미했고, 해외 문화 교류를 차단한 시기였어요. 외국에서 예술 책을 주문하면 김포공항에서 책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트 뉴스를 통해 <미술 수첩> <아트 포럼> <아트 인터내셔널> <아트 프레스> 등 외국에서 발행하는 잡지와 책, 논문을 발췌해 외국어 잘하는 멤버들이 번역해서 나누어보고 토론했어요. 30여 명이 활동했는데, 미술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가와 연극인, 사업가도 있었어요.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었고, 전시를 함께 열기도 했지요. 공개적으로 활동한 모임이었고, 위계질서가 없었어요. 예술가의 권위를 만들고 힘을 키우려는 의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토론하고 해외 문화를 이론적으로 흡수하려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김구림, 김종학, 이승택, 성찬경, 황석영도 우리 모임에 속해 있었지요. 중·고등학생도 교사와 오기도 했지요. 지금은 해외 교류가 활발하지만 이런 모임이 다시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세계 빅 5 갤러리인 페이스 전속 인기 작가이시지만 10년 전만 해도 작품이 판매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힘드신 적은 없으셨는지요?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미술관에서 아주 가끔 작품 판매 요청을 받을 뿐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는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사회를 분석해 내 작품이 오랫동안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대 상황을 알면서 이를 부정하고 비관하면 비겁한 짓이지요. 우리나라는 얼마 전만 해도 소통이 어렵고 전위 미술 작품을 구매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전적으로그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전에는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하이퍼리얼리즘이나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서정적인 작품이 인기가 있었지요. 나는 새로운 작업을 전개하고 있으니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고,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권위를 가진 화랑 시스템에 의해 내 작품도 관심을 받을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나의 예측이 얼마 전부터 맞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미래를 멀리 보았고, 당시 갤러리와 미술 애호가는 나와 관점이 달랐습니다. 미술 시장은 확대되고 있지만, 여전히 대중은 미술에 관심이 없어 아쉽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미술계의 지속적인 논의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 미술진흥법이 시행되어야만 작가들이 마음 놓고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고 생각해요.

군산에서 미술대학 교수로 오래 재직하셨습니다. 후배 작가에게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현대미술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는 예술입니다. 또 여러 가지 중요한 사회현상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하면서 새로운 예술로서 발언하는 것이지요. 외국 미술 경향이나 사조를 열망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 작가로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문제에 반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현재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지 해외 미술에 열등감이나 지나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정직한 태도로 작업에 임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생각도 다 남의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1970~1980년대까지만 활동하고 작가를 그만두거나, 작업을 했다가 안 했다가 오락가락했다면 쓸모없는 작품 세계를 구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끝까지 가고 있습니다. 군사정권의 고문으로 무릎을 다쳐 몇 년간 절뚝거리며 다니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예술을 양식 주의나 스타일로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는 태도를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몸을 사용하게 되면서 회화의 밖에서 안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회화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또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미술에 대한 생각으로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는 미술을 장르 의식 안에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술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미술과 결합할 수 있는 모든 매체를 작품으로 수용했어요. 내가 페이스 갤러리, 리안 갤러리, 현대 갤러리에서 최근 작품을 전시했는데, 어떤 50대 관람객이 나에게 “퍼포먼스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언제 그림을 그리셨습니까?” 하고 물어 깜짝 놀랐습니다. 나를 행위예술가라는 예술 장르로 규정하니까 그런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이지요. 조각가는 조각만 하고, 판화가는 판화만 해야 합니까? 나는 미술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예술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미술가는 재주꾼, 장이’라는 의식을 거부합니다. 대중을 위해 미술에 대한 사회교육 시스템을 확대하고, 미술 대학에서 장르를 나누는 교육제도를 없애야 합니다.

앞으로 미술관을 건립할 계획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신체 드로잉’ 연작 중 76-3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트 모양의 결과물로 완성됩니다. 처음에는 누가 나에게 하트 모양의 작품이라고 하면, 아니라고 부정하며 펄펄 뛰었습니다. 76-3은 캔버스 옆에 서서 오른팔로 선을 긋고, 반대편에 서서 왼팔로 선을 그으면 두 개의 선이 합쳐져 완성되는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하트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지금은 나도 그냥 하트라고 부릅니다.(웃음) 76-3 연작을 1백 점 그려서 전시하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어요. 하트 미술관이지요. 남녀노소 누구나 친근감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미술관이 될 겁니다. 100호 혹은 50호 크기의 1백 점을 걸어놓으면 멋질 겁니다. 물론 다른 작품도 기획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전시를 해야지요. ‘이건용 미술관’보다는 ‘하트 뮤지엄’이라는 이름이 근사하지 않습니까?

 

이건용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은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신체는 그만큼 중요하고,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행위가 매체와 평면과 만나서 회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대중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가 ‘신체 드로잉’ 76-3 하트 연작을 그리려면 옆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는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예찬한다. 주종 관계에서는 서로 정면만 바라보지만, 펭귄처럼 서로의 옆모습을 보면 추위도 이겨낼 수 있고, 서로의 울타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만들어낸 끝없는 유대 관계가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고,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모든 공해와 파괴로부터 회복하는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https://www.marieclairekorea.com/culture/2023/09/art/?utm_source=naver&utm_medium=partnership